이직하는 직원의 '거래처 빼돌리기' - 중소기업의 법적 방어선
거래처 명단 하나에 회사의 생사가 걸려 있는 곳이 중소기업이다. 보안 시스템이 촘촘한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거래처 관계가 '믿음'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 믿음이 깨질 때, 다시 말해 핵심 직원이 거래처를 가지고 경쟁사로 옮겨갈 때, 회사가 받는 타격은 매출 일부의 감소가 아니라 사업 기반 자체의 흔들림이다.
이직 자체는 직원의 정당한 권리다. 문제는 이직 과정에서 거래처에 접촉해 "곧 옮겨갈 회사에서 계약을 다시 합시다"라고 권유하는 경우다. 이런 '거래처 빼돌리기'가 법적으로 어떻게 다뤄지는지, 그리고 중소기업이 어디까지 사전에 방어할 수 있는지를 정리한다.
재직 중 거래처에 접촉하는 순간, 업무상 배임이 시작된다
형법 제356조의 업무상 배임죄는 재직 중 직원이 회사에 대한 임무를 위배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본인이나 제3자가 이익을 취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핵심은 '임무 위배'와 '손해'의 해석이다.
법원은 '임무 위배'를 좁게 보지 않는다. 법령·계약·신의칙상 당연히 해야 할 행위를 하지 않거나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해 신임관계를 저버리는 일체의 행위가 임무 위배에 포함된다. '손해'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발생한 손해뿐 아니라 거래 기회 상실 등 손해 발생의 위험까지 포함되며, 손해액이 구체적으로 산정되지 않아도 손해 발생과 이익 취득이 인정되면 배임죄 성립에는 영향이 없다는 것이 법원의 일반적 입장이다.
재직 중인 직원이 거래처에 접촉해 "곧 옮겨갈 경쟁사와 계약을 변경하자"고 권유하는 순간, 회사는 그 거래처를 잃을 위험에 놓이고 직원은 새 회사에서의 입지를 얻는다. 이 구조 자체가 업무상 배임의 구성요건을 채운다. 거래처가 실제로 옮겨가지 않았더라도, 그 위험을 발생시켰다는 사실만으로 형사적 책임의 영역에 들어선다.
"경업금지 약정이 없었다", "사직서 냈다"는 주장의 한계
해당 직원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두 가지 주장을 자주 들고 온다. "별도의 경업금지 약정이 없었다"는 주장과 "사직서를 제출한 후의 행위였다"는 주장이다. 두 주장 모두 법원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광고대행업체 사례에서 법원은 광고주 모집 업무를 담당하던 직원이 퇴사 전 광고주들에게 연락해 경쟁업체로 계약을 변경하도록 권유한 행위를 두고, "광고주 모집 업무가 전체 업무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상, 재직 중 광고주들에게 다른 광고대행업체를 소개하는 행위는 당연히 금지되는 행위"라고 분명히 판시했다. 별도의 경업금지 약정이 없어도 직무의 성격 자체에서 금지의무가 도출된다는 것이다.
사직서 제출 후의 행위라는 주장도 다르지 않다. 법원은 "사직서를 제출했더라도 근로계약이 종료되기 전까지는 경업금지의무를 포함한 업무상 임무가 유지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사직서가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인수인계 기간이라는 시간적 공백을 거래처 접촉의 기회로 삼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기간이야말로 형사적으로 가장 위험한 시점이다.
영업비밀 침해와 중소기업의 사전 방어 체계
해당 직원이 거래처 접촉 과정에서 회사의 거래처 명단, 담당자 연락처, 거래 조건 등을 활용했다면,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 침해죄도 별도로 문제된다.
영업비밀의 핵심 요건 중 하나는 '비밀 관리성'이다. 정보를 회사가 비밀로 관리해 왔는지를 보는 것인데, 법원은 회사의 규모와 관계없이 합리적인 관리 조치가 있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중소기업이라고 해서 비밀 관리 의무가 면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소기업일수록 평소 고객 정보에 대한 접근 제한, 비밀 표시, 접근 권한 기록 등의 조치를 갖춰 두는 것이 사후 분쟁에서 결정적이다.
문제 발생 이후의 사후 처벌만으로는 회사의 손실을 회복하기 어렵다. 거래처 변경이 이뤄지기 전 단계라면 업무상 배임에 기한 불법행위 금지 가처분,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 침해 금지 가처분을 선제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가처분의 핵심은 속도이며, 거래처 변경이 완성되기 전에 법원의 결정을 받아 두는 것이 사건의 결론을 가른다.
신뢰는 회사의 자산이지만, 법적 방어선은 될 수 없다. 중소기업이 거래처를 지키는 길은 입사 시점의 약정에서 시작된다.
이보미 파트너변호사 · 법무법인 화온 · 법률방송 출연
직원의 성장을 응원하는 마음은 모든 경영자의 진심이다. 그러나 '거래처 빼돌리기'는 업무상 배임과 영업비밀 침해라는 형사 범죄의 영역으로 곧바로 넘어간다. 사후 처벌은 회사의 잃어버린 거래처를 되돌리지 못한다.
핵심은 사전 방어다. 입사 시점부터 비밀유지 약정과 경업금지 약정을 체결하고, 거래처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을 기록 가능한 형태로 관리하는 것. 이 평범한 작업이 회사의 지속 가능성을 지키는 사실상 유일한 길이다.